나는 산 좋고 공기 좋은 밀양 표충사 계곡에서 자랐다. 평생 농사를 짓고 사신 아버지는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딸래미는 대충 키워서 보내야 된다. 여자는. 남자 그늘 밑에서 사는 게 행복이다.”
아버지께서 진리인 양 하시는 말씀이 늘 섭섭했지만 어머니조차 동의하는 분위기에서 딱히 반박할 수 없어 묵묵히 들었다. 두 살 위인 오빠는 집안의 기둥이고 제사를 지낼 중요한 인물이지만 딸인 나에게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셨다. 여자는 남자 잘 만나 시집가면 그만인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는 이유로 대학 진학을 반대하셨고 나는 남자를 만나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며 우겨서 학교를 갔다.
아버지는 딸은 자식이 아니라고 하시며 시집을 가서 시댁에 일이 있으면 부모 제사도 올 수 없는데 그게 어떻게 자식이냐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부모 제사에는 갈 수 있겠지 딸자식을 너무 비하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는데 임신 중에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며 나에게 자신의 장례식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만삭의 몸으로 왔다가 혹시 잘못되면 시댁에서 눈치를 줄 거라는 이유였다. 자신의 죽음이 딸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목놓아 울었다. 한 달 후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다행히도 갈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시대는 조금씩 변해갔지만 드라마에도 영화에도 늘 여자 주인공은 힘든 과정을 겪다가 왕자님이 구해주면 해피엔딩이 되는 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시크릿 가든’, ‘파리의 연인’, ‘꽃보다 남자’ 등 똑같은 신데렐라 컨셉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양산되고 사회는 그런 스토리를 여성들이 더 좋아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디즈니가 만든 겨울왕국은 달랐다. 엘사는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고 북쪽 산으로 가서 혼자 지낼 만큼 강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평화를 찾는다. 굳이 남자주인공이 나타나 구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나는 겨울왕국을 보며 특별히 감동받는 내 모습을 본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영화를 보며 자랐다면 좀 더 용기 있게 자랐으리라 생각해본다. 5년을 기다린 겨울왕국2는 더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여왕이라는 편한 자리를 두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엘사의 모습. 세찬 파도가 치는 성난 바다 앞에 우뚝 서 있던 엘사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외투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기 위해 머리를 질끈 묶던 엘사의 모습을 나에게 투사하고 싶어 진다. 과거 열두 살의 나에게 돌아가 이 영화를 꼭 한 번 보여주고 싶다.
나는 엘사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여자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엘사 원피스를 입고 엘사처럼 당당하고 씩씩하게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꾸며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자라나기를 소망한다. 엘사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적어도 여성이라서 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느끼며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딸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묶어 옥죄던 보이지 않는 창살을 그만 거두고 우리 아이들이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당당히 자라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더 이상 성차별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자라도록 어른들부터 교육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겨울왕국의 엘사를 사랑하고 응원한다.
박서진(창원시 평화인권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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