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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인권신문

들리게 적고 보이게 적다. '화면해설작가'

by 사자자리 2024. 12. 17.

 

 

  지금으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서면역 2호선에 내려 지하 상가를 지나 롯데백화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20대 청년이 사람들 속에서 걸음을 멈춘 채 저기요~ 서면 구경나왔는데 롯데백화점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청년을 돌아봤을 때, 한 손에는 흰지팡이(시각장애인이 활동하는데 사용하는 보조기구)를 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지팡이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불편한 이야기를 했다. "눈도 안보이는데 혼자 어떻게 가려고 나왔냐, 저래가지고 무슨 구경을 할게 있냐" 등의 말이었다. 나는 청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롯데백화점 쪽으로 가실거면 저와 같이 가요. 저도 롯데 가는 길이에요.” 청년은 말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서면 구경 나왔는데 도저히 여기서부터는 갈 수가 없네요.”

 

시각장애인과 소통할 때는 <정면에서 이야기하기, 방향을 알려줄 때는 시각장애인을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으로 알려주기, 같이 걸어갈 때는 약간 반보 앞에서 팔꿈치를 살짝 내밀어 시각장애인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하고 친절한 말투 사용하기, 지시대명사(이쪽, 저쪽, 거기..)를 사용하지 않기> 이런 방식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는 청년과 걸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소통방식을 사용하여 가는 곳까지 안내를 했다.

그렇게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각장애인과 소통하고 길 안내를 했다. 헤어질 때는 구경 잘하고 가라는 인사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청년도 나와 똑같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단지 눈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청각, 후각, 촉각을 통해 더 깊이 있게 본다는 것이달랐을 뿐이다.

 

나는 올해 경남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화면해설작가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생소한 직업이기는 하나 화면해설작가라는 직업이 존재한다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의 법적 근거는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법 제69조 제8: 방송사업자는 장애인의 시청을 도울 수 있도록 한국수어ㆍ폐쇄자막ㆍ화면해설 등을 이용한 방송을 하여야 한다. >이다.

2023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방송에서 서두나 말미에 화면해설작가와 성우가 누군지 음성으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2년부터 KBSMBC를 시작으로 점차 케이블 방송 및 민영 방송으로까지 확대돼 2015년부터 전국의 모든 방송사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2020년대 들어 넷플릭스에서도 일부 드라마와 영화에 화면해설방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화면을 음성으로 해설해주는 음원을 녹음해 주음성과 믹싱한 후 부음성에 실어서 음성다중으로 송출한다. 종합편집 후에 다시 사운드 믹싱을 해야하기 때문에 과정이 복잡해서 제작 기간이 더 걸린다.

음악 영화, 스포츠영화, 뮤지컬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연극, 뮤지컬등 TVOTT 서비스까지 화면해설이 필요한 영상 콘텐츠는 늘고 있지만 국내 화면해설 작가는 많지 않다고 한다.

 

영화의 경우 영화제 등 특정 시기에 장애인들의 극장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베리어프리' 형태로 제작되고 있다. 음성에는 화면해설 대사가, 영상에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추가되어 동시에 상영되는 형태다. 하지만 그 상영 횟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상황이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주연을 비롯하여 내가 좋아하는 배우, 감독, 장르, 줄거리 등의 정보를 파악하여 영화를 선택한다. 그만큼 영화를 골라보는 재미가 크다. 시각장애인들은 영화를 고르는데도 접근성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실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한정된 정보만 가지고 보게 된다. 등장인물의 대사는 청각으로 들을 수 있지만 그 외에 풍경, 인물의 표정, 몸짓 등 시각에만 의존해야 볼 수 있는 부분 즉, 들리지 않는 부분들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영화를 관람하다가 어떤 소리가 들리면 어떤 상황에서 나오는 어떤 소리인지 궁금해하여 머물게 되어 영화를 집중해서 보는데 방해가 된다고 한다. 화면해설을 통해 무슨 소리인지 듣게 되면 바로 이해를 하고 영화에 더욱 집중을 할 수 있다. 화면해설은 소리에만 의존하여 시청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영상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높이기 위해 장면의 전환,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몸짓, 대사 없이 처리되는 영상 등을 화면해설 작가가 원고를 적고, 성우가 녹음을 한다.

 

20대에 서면에서 시각장애인을 만난 나, 화면해설작가 과정을 수료하고 화면해설작가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나, 지난주 경남농아인협회 창원시 마산지회에서 수어기초수업을 수료한 나의 연결고리들을 생각해 보면 베리어프리(Barrier-Free)’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베리어프리란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 이동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물리적, 사회적 장벽을 제거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편리학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다. 베리어프리하면 장애인을 많이 떠올리지만 결국 누구나 노인이 되고 노화가 진행되면서 시각, 청각, 촉각등 감각기관의 퇴행과 함께 신체의 기능도 떨어지게 된다. 베리어프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베리어프리 화면해설 영화를 예로 들면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시력, 청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영화를 제대로 풍부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간호·복지를 전공했고, 관심 분야가 노인, 임종·홈스피스 분야이다. 그랬기에 직장생활도 30대부터는 주로 노인 분야에 관련되는 일을 하였다. 창원시 평화인권센터에서 부엉이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노인 뿐만 아니라, 아동·청소년, 장애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관심이라기보다 인식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들과 소통하는데 필요할 것 같다는 인식이 생겨 수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 쉽지는 않지만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하게 된다.’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배우고 있다.

 

화면해설 작가과정을 통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졌지만 아직도 배우고 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 내가 적은 글이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볼 수 있고,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배우고 도전하고 싶다.

 

나도 16년 뒤에는 노인이 된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는 모든 영화, 방송에서 제작되는 모든 프로그램이 베리어프리로 제작이 되어 누구나 불편함 없이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화면해설작가로서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고자 한다.

 

 

정애라(창원시평화인권센터 활동가)